가네다성이란, 667년에 아소만의 남쪽에 축성된 산성으로 『일본 서기』에도 등장합니다. 일본은 백제군을 지원하여 벌인 백강구 전투(663년)에서 패했기 때문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최전선 방위 시설을 쓰시마 섬에 구축하였습니다. 한국과의 교류 중 한반도와 긴장 관계에 있는 와중에도 축성 방법은 조선식 산성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에서 망명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거북점이란, 바다거북의 등껍질(복갑)을 태워 그 금의 균열에 따라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 의식을 말합니다. 에도시대에는 매년 정월 3일에 거행되어 그 결과는 쓰시마번청에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이 의식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쓰시마 거북점 전기』에 의하면, 쓰시마 우라베 일족의 선조인 이카쓰오미가 진구 황후를 따라서 한반도에 건너가 거북점의 기술을 습득하여 돌아왔다고 합니다. 현재에는 쓰쓰 지역에만 남겨져 대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벼의 원생종이라고 하는 ‘적미’에 깃든 정령을 ‘신’으로 모시는 행사입니다. 일본에서는 태곳적부터 벼의 재래종이 없었다고 추정되므로 쓰시마 섬의 적미는 조몬시대 후기부터 야요이시대(2000∼2500년 전)에 걸쳐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해진 벼라고 추정됩니다. 그 행사의 작법은 동아시아 각 지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쓰시마 섬에서는 쓰쓰 지역에서만 신을 모시는 의식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반쇼인에는 역대 쓰시마번 영주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초대 영주 소 요시토시(1568∼1615)를 제사 지내기 위해 창건한 것이 효시입니다. 역대 영주는 조선과 일본의 교류라는 쓰시마 섬의 숙명적인 과제에 직면하여 최선을 다해 우호 관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특히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 왕조의 중개역할을 하였으며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는 그가 없었다면 실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 묘지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14명의 영주와 그 정실, 측실 또는 조선 외교로 공적을 세운 인물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향로, 꽃병, 촛대(삼구족)를 불전에 놓고 향, 꽃, 등화를 공양합니다. 이 삼구족은 조선 국왕이 봉납하였다고 전해지며, 중국의 옛 청동기에 디자인한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향로는 왼발을 약간 들어올리고 입에서 향의 연기를 내뿜는 사자, 촛대는 귀여운 표정으로 위를 우러러보는 거북과, 늠름한 자태의 기품이 넘치는 학을 본 떠 조형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신라시대(8세기)에 만들어진 동조 불상으로 구로세 관음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육신부와 의복 부분을 별도로 만들어 조립하는 고도의 기술이 채택되어,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섬세하게 흐르는 듯한 옷자락의 주름은 한반도에서 제작된 불상 중에서도 단연 돋보입니다. 한반도에서 쓰시마 섬으로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구로세 지구의 주민들은 소중하게 보호하며 ‘여신’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위해 1591년 이즈하라의 시미즈야마 산에 축조된 산성입니다. 해발 260m의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능선 위에 이치노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축조되어 있고 나란히 늘어선 석루가 장대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정상에서는 이즈하라의 성하마을, 항구 그리고 이키 섬으로 이어지는 넓은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16세기 말,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한 소 요시토시는 이 경치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쓰시마번 영주 소 일족이 거주하던 성터로, 시미즈야마 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528년 소 일족의 내분으로 이전에 거주하던 성 이마야시키의 ‘이케노야카타’가 소실되자 그 후 영주 소 마사모리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678년에 사지키하라성이 완공될 때까지는 소 일족이 거주하는 성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에는 일본의 관문으로 조선통신사의 영빈관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현재에는 망루문이 복원되었고 돌담의 일부도 남아 있습니다. 에도시대에 그려진 그림(현립 쓰시마 역사민족자료관 수장)과 맞추어 보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에도시대 17세기 말경, 쓰시마번 영주 소 일족이 거주한 가네이시성 내에 조영된 정원입니다. 소 일족의 문서 『매일기(每日記)』에는 1690년부터 1693년까지 3년에 걸쳐 ‘성’에 ‘신지이케 연못’을 조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종전 후, 이 정원은 매몰 상태에 있었지만 사적명승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1997년에서 2004년까지 7년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습니다. 쓰시마번은 조선통신사를 이곳에서 영접하고 수면에 비치는 달을 보며 조선과 일본의 영원한 우호를 염원하면서 정원에서 우호를 다졌을 것입니다.
쓰시마 섬에는 조선통신사에 관한 두루마리 그림이 2종류 전해지는데, 거기에는 쓰시마번이 통신사의 행렬을 선도하고 경호하는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후, 쓰시마번은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재개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1607년에서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사절단을 맞이하였습니다. 본 두루마리 그림은 17∼18세기에 하나가 제작되었고 다른 하나는 19세기에 제작되었는데, 2015년에 ‘쓰시마 소 일족 관계 자료’의 하나로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행렬이라는 긴장감 넘치는 공간에 ‘짚신 끈을 묶는 사람’이나 ‘짖고 있는 개’ 등이 그려져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쓰시마번이 1663년에 만든 선거(船渠·도크)입니다. 이즈하라항의 남쪽에 위치하는 구타우라에 인공 후미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에도시대, 동서남북으로 교역한 선박이 이곳으로 귀항하여 선박 수리 등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서적 『해동제국기』(1471년 간행)에는 ‘구타우라 조선’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오후나에 선창’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선거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존하는 선창 중에 이 정도 규모와 당초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일본 내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선창 유구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스나(佐須奈)항은 조선으로 통하는 현관문 역할을 하며 고대부터 번성한 양항으로 조선통신사가 상륙한 곳입니다. 에도 시대에는 쓰시마번주 소 요시자네(義真)가 히나타(日向)와 가게(陰) 2곳에 아라타메반쇼를 설치하여 밀항자와 밀무역을 감시했습니다. 히나타반쇼의 돌담과 우물이 현재에도 잔존하여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이 지역을 통해 ’고코이모(考行芋)’라 불리던 고구마가 한반도에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와니우라(鰐浦)는 과거 한반도와의 통교 무역 창구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 상륙지 중 하나입니다. 항구 서쪽에는 조선통신사 선박의 정박지라 불리는 야비츠(矢櫃)가 있으며 현재에도 그 석적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대륙으로 통하는 창구였던 쓰시마를 상징하는 대륙계 식물인 이팝나무의 자생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과 약 50km 거리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날씨 좋은 날이면 한국 부산시의 거리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