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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遺産 国境の島 壱岐・対馬・五島 ~古代からの架け橋~

국경의 섬 이야기

2015년, 일본유산으로 지정된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고대부터의 가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15년, 일본유산으로 지정된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고대부터의 가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15년, 일본유산으로 지정된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고대부터의 가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15년, 일본유산으로 지정된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고대부터의 가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키·쓰시마·고토 소개

일본유산이란?

일본유산(Japan Heritage)’은, 지역의 역사적 매력과 특색을 통해 일본의 문화와 전통을 전하는 스토리를 ‘일본유산(Japan Heritage)’으로 문화청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문화청: ‘일본유산(Japan Heritage)’에 관하여

이야기의 상세 내용

크고 작은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 일본. 일본의 서쪽 끝에 위치하는 나가사키현에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971개의 섬이 있습니다.
한반도와의 사이에 징검돌처럼 떠 있는 이키 섬과 쓰시마 섬, 동중국해 위에 사슬처럼 늘어서 있는 고토 열도는 고대부터 일본과 대륙을 이어주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지리적으로 대륙 및 한반도와 가깝기 때문에 활발한 국제 교류와 긴장 관계의 최전선에 위치하였습니다.

위지왜인전에 기록된 국경의 섬

일본이 아직 ‘왜’라고 불리던 시대, 위나라의 사절은 한반도를 남하하여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을 경유하여 왜국의 여왕이 있는 야마타이국을 향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안에 있는 ‘위지’왜인전(*1)에는 쓰시마국(현재의 쓰시마시)과 이키국(현재의 이키시)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야칸코쿠(금관가야)에서 바다를 건너면 먼저 쓰시마국에 도착한다. 산은 험준하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으며 길도 정비되지 않았다. 좋은 논이 거의 없어 해산물을 먹고 생활하며, 남과 북으로 가서 교역을 한다.
쓰시마국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이키국에 도착한다. 바다 이름은 간카이라고 한다. 숲이 많고 논은 조금 있으나 논을 갈아도 식료가 모자라므로 역시 남과 북으로 가서 교역을 한다.(‘위지’왜인전(현대어역)에서 발췌)
쓰시마 섬은 한국의 부산까지 불과 49.5km의 거리에 위치합니다. 우뚝 솟은 산들과 높이 100m에 이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볼 수 있습니다. 섬의 89%는 산림으로 시라타케와 다테라산에는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원시림이 남겨져 있어 ‘위지’왜인전에 기록된 쓰시마 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평지가 적고 경지가 부족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쓰시마 섬은 고대부터 배를 타
고 남쪽(일본 열도)과 북쪽(한반도)을 왕래하며 사람, 물건,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 ‘위서’ 제30권 동이전·왜인조의 통칭

바닷길에 떠 있는 국제 교류 도시

이키 섬은 쓰시마 섬과는 대조적으로 산지가 적은 평탄한 섬입니다. 섬내에서 가장 긴 하타호코가와 강 유역에 펼쳐지는 후카에타바루 평야에는 야요이시대, 이키국의 왕도 ‘하루노쓰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한반도를 왕래한 고대의 선박은 이키 섬의 동부에 위치한 우치메 만에 정박한 후, 사람과 물건을 작은 배에 옮겨싣고 하타호코가와 강을 약1.5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선착장을 향했습니다.
하루노쓰지 유적에서 발견된 선착장 유적은 대륙에서 전래된 고도의 토목 기술로 만들어진 왕도의 출입구에 걸맞는 훌륭한 선착장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국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빨리 해외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하루노쓰지는 해상 교역으로 왕도를 세운 국제교류도시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살고 있어 활기에 넘쳐 흘렀습니다.
하루노쓰지 유적에서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토기, 중국의 화폐,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인면석 등 일본 국내외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중국제 망울구슬은 여성과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복원된 건물과 주변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은 마치 야요이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합니다.

거석 고분이 말해 주는 국경의 섬

6세기 후반 이후, 신라, 고구려 등 한반도의 각국과 왜국의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이키 섬에서는 고분이 왕성하게 축조되었습니다. 소로쿠 고분, 사사즈카 고분 등 이키 섬 유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석으로 축조된 고분 석실(*1) 안에서는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북제에서 제작된 2채색 도기와 녹유(*2)를 바른 신라 토기 등은 당시의 왜국 사회에서도 한정된 계급의 유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이키 섬의 거석 고분에 매장된 사람 중에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파견된 유력자도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즉, 당시의 이키 섬은 한반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차갑고 싸늘한 석실 안에 들어가면, 거석 고분에 매장되었던 인물의 권세가 피부로 전해져 옵니다.

*1. 사망자를 매장한 방
*2. 도자기 표면에 바르는 녹색 유약

사키모리 병사의 애처로움을 느낄 수 있는 국경의 섬

한반도에서는 당나라(중국)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663년, 왜국은 백제의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지만 나당 연합군에 대패(백강구 전투)하였습니다. 왜국은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이키 섬과 쓰시마 섬에 사키모리 병사(*1) 와 봉수대(*2) 를 배치하고, 쓰시마 섬에는 망명한 백제인의 기술로 조선식 산성인 가네다성을 구축하였습니다.
사키모리 병사는 주로 동국(*3) 에서 파견되어 자급 자족의 생활을 하면서 방비에 노력했지만, 3년의 임기를 끝내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사키모리 병사들이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는 애처로운 마음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와카집 『만요슈』에 ‘사키모리 병사의 시조’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쓰시마 섬의 봉우리에는 산기슭에 걸려 있는 구름이 없네. 신성한 봉우리에 길게 뻗어 있는 구름을 보면서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오.
가네다 성터에 서서 국경의 바다를 내려다보면, 고향을 그리워한 사키모리 병사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오릅니다.

*1. 고대, 북부 규슈 지방의 요충지를 방비하고 있었던 병사
*2. 외적의 침입 등을 알리기 위해 연기나 봉화를 올리는 설비
*3. 일본열도의 중부·동부 지방

견당사가 왕래한 국경의 섬

일본은 630년에서 838년에 걸쳐 조선 등 동아시아의 정보를 수집하고, 당나라의 선진 제도와 문화 등을 배우기 위해 수 백명의 사절단(견당사)을 4척의 배를 이용하여 파견했습니다. 견당사선은 당초, 이키 섬·쓰시마 섬을 지나 한반도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었지만, 663년에 일어난 백강구 전투 이후, 신라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고토 열도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중국 대륙으로 가는 위험한 항로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배 구조, 항해 기술로는 전원이 무사하게 귀국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견당사들은 일본의 마지막 기항지였던 고토 열도에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고 결사의 각오로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사이초와 구카이 스님은 804년에 견당사선을 타고 고토 열도에서 당나라로 건너가 선진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귀국하였습니다. 그 후 사이초가 천태종을, 구카이가 진언종을 개창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쓰시마 섬, 고토 열도에는 두 스님에 관한 전설이 남겨져 있습니다.
견당사들이 마지막으로 본 일본의 풍경 고토 열도. 눈앞에 펼쳐지는 동중국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구카이 스님이 남긴 ‘지본가이’(*1) 라는 말이 마음 속에 울려 퍼집니다.

*1. 일본의 가장 서쪽 변두리 섬을 떠난다는 의미.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뒷받침한 쓰시마번과 조선통신사

쓰시마 섬은 고대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과 교역을 하며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무로마치 시대에는 쓰시마 도주 소씨를 중심으로 조선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1) 에 의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쓰시마 섬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국교 회복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초대 쓰시마번 영주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사절을 몇 번이나 보내어 국서를 위조하는 등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양국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여 1607년, 에도시대 최초의 조선통신사(*2) 의 일본 방문을 성공시켰습니다. 이래, 약200년 동안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12차례나 계속되어 쓰시마번이 조선과 일본의 외교 실무를 전담하였습니다.
이웃나라끼리 200년 이상이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보기드문 경우로, 그 저변에는 쓰시마번 외교를 담당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서로를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신의를 가지고 교제한다’라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국제교류에서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1. 1592년의 임진왜란, 1597년의 정유재란
*2. 조선 국왕의 국서를 일본의 쇼군에게 전달하는 많은 인수로 구성된 외교사절단.